모두 4등급의 활제작자로 유명한 페틱형제들과 그들의 조카에 대한 얘기이다.

1. 빅토르 페틱 Victor Fetique

1872년 미르쿠르(Mirecourt)에서 활 제작자인 Charles Claude Fétique의 아들로 태어난 빅토르 페틱 Victor Fétique은 어느 아이들 처럼 이른 나이에 공방을 다니게 되었다.
우선 Charles Claude Husson에게서 기초를 배우게 되었고, Fournier Maline과 Emile Miquel에게서 솜씨를 가다듬었고, 마지막엔 니콜라 바장 Charles Nicola Bazin의 공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초기작은 바장의 작품을 모방하려한 것이 보인다.
1896년 그는 잔 마들렌 메이어(Jeanne Madaleine Meyer)와 결혼했고 부부 사이에 외아들 마르셀 가스통(Marcel Gaston)이 있었는데, 아들 역시 활 제작자가 되어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조력했다.
1901년,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카레사 & 프랑세(Caressa & Francais)'에서 12년 동안 근무했다. 이 긴 체류 기간과 당시 같은 공방에서 일하던 클로드 토마상(Claude Thomassin)과의 친분 덕분에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클로드 토마상도 니콜라 바장의 공방에서 견습생활을 하였다.
1913년, 그는 파리의 미라 거리(Rue Myrha)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초기에는 사업이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이 있어 알파카(alpacca, 백동)로 장식된 학생용 활을 제작해야만 했지만 1915년부터는 사업이 잘되기 시작했다.
그는 "VTOR FETIQUE A PARIS" 라는 스탬프를 사용했다.


그의 스타일은 초기의 바장 스타일에 벗어나 그당시 유행하던 사토리-라미 스타일을 따랐다.
"프랑스 최고제작자(Ouvriers de France)"라는 상까지 받으며 잘 나가던 그였지만 몇년후 심장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고 1921년 부터는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쏟아지는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미르쿠르에서 활을 구매하여만 했다. 1926년까지 Auguste Thomassin, Claude Rémi, 루이 모리조(Louis Morizot) 등이 그를 위해 활을 제작하였다.
그는 배달된 활들을 약간 리터치만 한 후 자신의 스탬프를 찍어 판매했다. 납품활 들도 품질은 괜찮았지만 그의 작품같은 수준은 아니였다.
1927년, 조카인 앙드레 리숌(André Richaume)이 공방에 합류하면서 활 제작 수준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후에 그와 마찬가지로 최고제작자 상을 타게되는 조카의 손에 금장, 거북등껍질 프로그를 가진 고급활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33년 결국 심장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1.1 마르셀 페틱 Marcel Fetique
빅토르의 외아들인 마르셀 페틱 Marcel Gaston Fetique은 아버지의 사망에 즈임한 1930년 93 rue de Maubeuge에 공방을 열었다. Mcel FETIQUE A PARIS 라는 스탬프의 활을 만들었으나 2차세계대전의 영향과 후반에는 수리에 집중했기에 수가 많지는 않다.
1.2 핀켈 가문
후반기 빅토르 공방의 직원에 Paul Weidhaas가 있었다. 그는 마르크노이키르헨 출신으로 Bausch등에서 실력을 쌓다 1920~1930년 경에 파리에서 페틱의 공방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 페틱의 스타일로 꾸준히 만들었고 큰 성공을 한다. 그의 직원 중에 지크프리드 핀켈이 있었고 자신의 딸과 결혼을 시키고 공방을 물려준다. 그의 아들인 요하네스 핀켈(Johannes Finkel) 대에서 더 유명하게 된다.
2. 줄 페틱 Jules Fetique
빅토르 페틱의 남동생인 그는 1875년에 태어났다. 에밀 미겔에게서 짧은 도제생활을 한 그는 니콜라 바장의 공방에서 1902년까지 일하게 된다. 그런 그의 모습이 바장 공방 사진에 담기게 된다.

1902년 그도 파리에 이주를 하지만 그의 행선지는 외젠 사토리의 공방이였다. 그는 사토리의 조수로 일하며 그의 헤드와 프로그 스타일은 사토리의 것과 흡사하게 된다.
비록 관계가 아주 긴밀하지는 않았지만, 파리 초기시절 형 빅토르와 가끔 협력하기도 했다. 1917년에는 형의 전 직장인 '카레사 & 프랑세(Caressa & Francais)' 공방과 협력을 시작했으며, 이 공방은 3년 뒤 '알베르 카레사(Albert Caressa)'로 바뀌어 그는 평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공방에 상주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사토리와의 협력도 1929년까지 계속 이어나갔다. 27년간 조수로 일하며 사토리의 성공에 일조한다.
이시기에 그의 활에 사토리 스타일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활 머리의 쐐기(wedges) 부분이 높아지고 프로필이 더 육중하고 직사각형에 가까워졌으며, 프로그에서도 도미니크 페카트의 스타일을 적용하는 등의 다시금 페캇 스타일을 재발견하게 된다.


1927년 형이 받았던 '프랑스 최고장인' 상을 받았다. 1934년 경기 침체로 인해 알베르 카레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해고해야 했고, 이때 59세이던 줄은 처음으로 모스크 거리(Rue Moscou)에 현악기 제작자 앙드레 뒤가드(André Dugad)와 공방을 열게 된다.

그는 "JULES FETIQUE PARIS" 스탬프를 사용한 활을 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애를 유명 공방에서 일했기에 그의 스탬프를 가진 활은 많지 않다.
1940년대 중반 은퇴한 그는 가니 레자베스(Gagny-les-Abbesses)로 이주하여 1951년 세상을 떠났다.
3. 앙드레 리슘 Andre Richaume

앙드레 리슘은 1905년 미르쿠르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Marie-Augustine Fétique로 앞의 페틱 형제의 누이였다. 그도 미르쿠르에서 도제생활을 했는데 확인된 바는 없으나 당시의 활들을 봤을 때 에밀 프랑소와 우샤(E.F. Ouchard)의 공방에서 일했으리라 추측된다.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한 그는 1927년 파리로 가서 와병중이던 삼촌 빅토르 페틱을 돕는다.
다른 한명의 삼촌인 줄 페틱이 1929년까지 사토리와 일했기에 사토리와 연결이 됬으리라는 것은 추측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사토리와 줄 페틱의 모양을 충실히 따랐다.

빅토르가 사망하기 1년전이 1932년 그는 결혼했고 Boulevard de Clichy 60번지에 자신의 공방을 열었다. 1955년에는 그의 삼촌들이 받았던 '프랑스 최고장인' 상을 수상한다.

리숌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57년에 시작된다. Igor Oistrakh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의 활을 구입했는데, 그의 아버지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그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1958년 파리 공연을 마친 그는 그의 연주활의 제작자를 궁금해하며 리숌을 방문했고 명성을 높여주었다.
그는 1966년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제작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쿠니오-위리 공방 (0) | 2026.03.29 |
|---|---|
| 영국 첼로 (0) | 2026.03.29 |
| 외젠 니콜라 사토리 (0) | 2026.03.26 |
| [번역] 프랑수아 니콜라 부아랭 (0) | 2026.03.26 |
| 아빠 베르나델 (0) | 2026.03.23 |